대화하면 화날 것 같아서.
퇴사를 결심한 사람이라면 이 한 문장에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퇴사 면담이라는 자리는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 왜 떠나는지를 물어보는, 꽤나 아이러니한 자리입니다. 말로 하면 감정이 실리고, 감정이 실리면 말이 꼬이고, 말이 꼬이면 나중에 꼬투리가 됩니다.
퇴사 면담이라는 이상한 구조
퇴사할 때 보통 퇴사 절차를 회사에서 주도합니다.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안전하게 퇴사를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안전하게’라는 말의 주어는 회사입니다. 퇴사자의 안전이 아니라, 조직의 안전.
그러다 보면 정확한 퇴사 사유를 회사에 알리지 못한 채로 어정쩡하게 퇴사하게 됩니다. 찝찝합니다. 내 퇴사가 어떤 메시지가 됐어야 하는데, 조용히 지나갑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가는 사람이고, 회사에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회사의 부당한 무엇인가를 이유로 나간다면, 그것은 나 한 명으로 그쳐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으로 확산되면 안 됩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퇴사 후 돌아오는 것
그래서인지 어떤 특별한 작업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퇴사하고 나면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보통 퇴사 면담에서 화가 나거나 흥분해서 한 말이나 행동을 꼬투리 잡아 그런 소문을 만들어 냅니다. “걔 나갈 때 이러이러했대”, “퇴사 면담에서 난리 쳤대” 같은 이야기가 남은 사람들 사이에 퍼집니다.
떠난 사람은 해명할 자리조차 없습니다. 이미 조직 밖에 있으니까요. 결국 퇴사의 원인이 된 문제는 묻히고, 떠난 사람의 태도만 이야깃거리가 됩니다. 교묘하지만, 몇 번 당해보면 패턴이 보입니다.
문서로 만들기로 했다
패턴을 알겠다 싶어서, 이번에는 퇴사 면담을 위해 퇴사 사유를 문서로 만들었습니다.
정말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생각나는 것만 적었습니다. 그나마도 정말 핵심적인 이유는 차마 문서로 남기기 어려울 것 같아 적지도 않았습니다. 적을 수 있는 것만 적었는데도 A4 11포인트로 총 5장 정도 분량이 나왔습니다.
모두 다 보여주면 면담하다가 멱살잡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중 1, 2페이지만 프린트해서 면담에 들어갔습니다.
상사는 두 페이지만 보여줘도 충분히 어이없어 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렇게 서로 어이가 없고 생각이 다르니 퇴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보다 윗사람이었으면 그를 내보냈을 텐데, 회사로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나가려고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퇴사 사유 문서화의 세 가지 장점
하고 싶은 말을 빠짐없이 전달할 수 있다
보통 ‘왜 나가려고 하냐’는 질문에 말로 대답하면, 그 대답을 물고 서로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잘잘못을 따지게 됩니다. 감정 섞인 소리들이 오가고, 원래 하려던 이야기의 절반도 못 하고 면담이 끝나버립니다. 기껏 준비한 말은 다 날아가고, 집에 돌아와서야 “아,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하고 후회합니다.
문서를 작성하면 빠짐없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말을 끊거나 주제를 돌려도, 문서가 거기 있으니까요.
감정 없이 냉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퇴사의 사유는 대부분 감정적인 이유입니다. 대화를 하면 말 속에 묻어 있는 감정이 함께 전달됩니다. 목소리가 떨리고, 억울함이 올라오고, 급기야 눈물이 나거나 화가 폭발하기도 합니다.
문서로 하면 좀 덜합니다. 작성할 때 되도록 사실 위주로 적고, 날짜와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글 솜씨를 너무 발휘하면 안 됩니다. 수식어를 붙이거나 감정을 실어서 쓰면, 그 문서는 호소문이 됩니다. 사실만 담담하게 나열하세요. 그게 가장 강력합니다.
퇴사 후 소문을 방지할 수 있다
이 세 번째 장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나는 떠났지만 문서는 남아있습니다. 퇴사 후에 나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내려고 해도, 퇴사 사유가 문서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방패가 됩니다. “퇴사 면담에서 난리 쳤대”라는 소문을 내려고 해도, 실제로는 문서를 기반으로 차분하게 면담했다는 사실이 남아있으니 주춤하게 됩니다.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남습니다. 퇴사 면담에서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문서 작성 시 참고할 점
실제로 퇴사 사유 문서를 작성할 때 몇 가지 팁을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실 위주로 작성하세요. “이런 일이 있었다”까지만 적고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는 빼세요. 감정은 읽는 사람이 알아서 느낍니다.
날짜와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세요. “작년에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는데”보다 “2025년 3월 12일 팀 회의에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가 훨씬 강력합니다.
전부 보여줄 필요는 없습니다. 5장을 작성했다고 5장을 다 내밀 필요 없습니다. 상황을 보면서 1~2장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려줘도 충분합니다. “더 있지만 여기까지만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한 마디가, 5장을 다 보여주는 것보다 효과적일 때가 있습니다.
사본은 반드시 보관하세요. 면담에서 제출한 문서의 사본을 개인적으로 보관해 두세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떠나는 사람의 무기
퇴사는 패배가 아닙니다. 하지만 떠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손해를 보는 경우는 많습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꼬투리를 잡히거나, 아무 말도 못 하고 찝찝하게 나오거나.
문서 한 장이 이 두 가지를 모두 방지해 줍니다. 퇴사를 준비하고 계신 분들은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면담 전에 조용히 문서를 만들어 보세요. 화날 것 같은 그 대화를, 차분하고 정확하게 끝낼 수 있습니다.